예술을 사랑한 과학자, 과학을 사랑한 예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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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예술가이면서 과학자인 누군가를 생각해 볼 때마다 두 전문가를 겸한 사람을 잘 떠올리지 못합니다. 과학은 분석적이고 구조적이며 결정론적인 반면, 예술은 창조적이고 경계가 없으며 영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두 전문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대신 두 분야를 아우르는 위대함의 예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닫는 것보다 훨씬 일반적입니다. 이번 포스팅은 어느 한 분야로 분류되기 힘든 7명의 예술가이자 과학자를 담아보겠습니다.

 

예술과 과학이 왜 겹치는가를 따져보자면, 과학은 헌신적인 연구, 분석, 칠판에 수식을 가득 작성하는 것일 수 있지만, 난제를 풀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던 그리스의 과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는 좀 다릅니다. 어느 날 밤 목욕을 하는데 갑자기 영감을 받고 '유레카' 하며 궁리했던 문제의 답을 일순간 떠올렸습니다. 영감은 예술가들이 그것을 중시하는 것만큼이나 과학자에게도 중요합니다.

 

훌륭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다보면, 그들의 작품이 영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숙련된 전문가가 추진력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 결과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간 형태를 예술적으로 묘사하는데 있어 독창적인 통찰력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통찰력은 수년 간 시체를 열어 해부하고 연구하고 나서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진: 다빈치 조각상)

아르키메데스와 레오나르도가 두 분야를 융합했듯이 다음에 이어질 전문가들 역시 그러합니다.

 

1. 사무엘 모스(Samuel Morse, 1791~1872)


19세기는 발명의 시대였고,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사무엘 모스입니다. 약 60km 가량의 원거리에서 전기적 부호만으로 즉시 의사소통이 가능한 단선식 선로 전신 시스템을 발명했습니다. 이것을 발명한 계기가 다소 뭉클한데, 아내가 사망한 일 때문입니다.

 

 

그가 워싱턴에 초상화를 그리러 간 동안 그는 아내가 매우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코네티컷에 있는 집으로 이동했으나 도착했을 때 아내는 벌써 사망하여 묻힌 뒤였습니다. 그는 소식을 늦게 들은 것을 원망했고 아내의 임종과 장례식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이러한 비극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신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모스 부호는 전 세계의 전신 운영자가 사용하는 통합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공동 창작물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정보전달의 방식을 바꾸기 이전에,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위대한 예술가들과 함께 공부했고, 그가 운영하는 보스턴의 작업실에서 미국 저명인사의 초상화를 그렸던 뛰어난 미술가였습니다.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독일 시인 중 가장 저명한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와 같은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유럽의 고전 문학에서 소수의 인물만이 하나의 이름으로 언급되는 영광을 가지게 되고, 그 이름이 어떤 인물을 가리키는지 알게 하지만 괴테가 그들 중 한명입니다.

 

 

괴테는 그의 시와 자연과학에 대한 열정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문학작품과 함께 괴테는 과학에 실제로 보탬을 준 식물학, 색채 이론에 대한 책을 출판했습니다. 괴테의 색채론에 의하면, 색채의 수는 무한하며 크게 '행복'과 '불안'으로 색을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가 연구한 식물학은 특히 형태학에 있어서 과학의 새로운 지류를 설립했습니다. 저서로는 1790년 'Metamorphoses of Plants'입니다.

 

3.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 1866~1943)


포터 부인은 사망한 후 수십 년 간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동화작가 중 한명입니다. 그는 28 권의 책을 집필했고 총 1억 권 이상 판매됐습니다. 가장 유명한 책은 '피터 래빗(Peter Rabbit) 이야기'인데 그녀가 그림까지 그렸습니다.

 

 

그녀의 목가적인 작품배경과 동물 캐릭터는 처음 그녀에게 강한 인상을 줬기 때문에, 아이들이 있는 어느 곳에서든 이 이미지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19세기 영국 가문의 상류 사회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포터 부인의 역량을 펼칠 만한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정식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그녀는 호기심, 자기주도학습으로 대신 채웠습니다.

 

30세가 되기 전, 그녀는 이미 열정적이고 숙련된 동식물학자가 되어, 식물과 동물에 관한 연구를 하고, 망원경을 보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녀의 성별과 정식 교육의 부족 때문에, 소수만이 그녀의 과학적 연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자연과 동물의 삶에 대한 연구는 그녀의 예술에서 귀중한 원천으로 밝혀졌습니다.

 

4. 헤디 라마(Hedy LaMarr, 1913~2000)

 


1930~40년대, 할리우드는 여성에 대해 확고히 이분법적인 관점을 뒀습니다. 바로 아름답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 입니다. 여성의 외모는 영화계로 입문할 발판이 됐고 재능과 열정으로 배우 생활을 유지하지만, 여성의 영특함은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헤디 라마에게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Algiers', 'Samson and Delilah'라는 영화로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화배우입니다.

 

그 당시의 관객들이라면 라마가 1941년 공동 발명가와 라디오 정보통신기술을 발명하고 특허를 낸 것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이 기술은 주파수를 빠르게 바꿈으로써 연합군 어뢰가 나치 무선 탐지기로부터 발각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녀 이전에도 수많은 여성 발명가들의 사례가 있었고 그때 이후에도 그랬듯이, 그녀는 그 당시 발명에 대해 어떠한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스펙트럼 도약 방식의 발명은 GPS와 블루투스를 사용하는 모든 것의 기술원천이지만 대가도 지불받지 못했습니다.

 

5. 라몬 이 카할(Santiago Ramon y Cajal, 1852~1934)


신경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할은, 뉴런이 어떻게 서로 정보전달을 하는지 최초로 밝혀낸 학자입니다.

 

 

카할은 뉴런이 서로 접촉 없이, 뉴런의 수상돌기와 축색돌기 사이의 시냅스에서, 화학 및 전기신호를 전달함으로써 신경계에서 정보가 오고 감을 발견했습니다. 즉 '시냅스'를 발견했으며, 신경세포가 수상돌기에서 축삭종말 방향으로 전해진다는 '역동적극성화'의 개념을 정립했습니다. 그는 연구를 이어갔고 1904년 '신경계구조의 연구'로 노벨생리학의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린시절 그가 의학을 전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화가를 꿈꾸기도 했으나 그의 아버지가 그의 생계를 염려해 의학을 전공하라고 압박했습니다. 카할은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예술가이기도 했습니다. 자연의 세계, 초상화, 그 외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리는 데 그의 삶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카할의 노고가 담긴 미세세포 그림은 세계 곳곳의 박물관, 예술관에 전시되곤 합니다.

 

6. 알렉산드르 보로딘(Alexander Borodin, 1833~1887)


그루지아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음악과 언어에 자연히 친근해지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이른 나이에 여러 악기를 배우고 작곡을 하면서 19세기 후반 '이고르 공' 가극 등 러시아 국민악을 구현한 주요 작품을 작곡하곤 했습니다.

 

 

국민악파: 19세기 후반 국민주의 운동이 모태가 되어 탄생한 음악. 전통, 관습 등 민족 고유의 정서, 가락등을 반영함.

 

그가 음악 역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겼으나, 음악을 전공한 것이 아니라 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에 진학했습니다. 1863년이 돼서야 정식으로 작곡을 배웠습니다. 또한 모교에서 외과 교수로서 화학을 가르치고 알데히드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1872년에 여성을 위한 의료 강좌 개설을 도와 여성교육 진흥을 발전시켰습니다.

 

7. 브라이언 메이(Brian May, 1947~)


현대 대중문화에서 브라이언 메이의 창작물만큼 자리를 잡은 창작물은 드물 것입니다. '퀸(Queen)'이라는 락 밴드의 기타리스트인 그는, 'we will rock you'라는 곡을 썼고 'we are the champions' 곡의 기타 솔로를 연주했습니다. 두 곡은 명곡들 중의 명곡입니다.

 

 

이 밴드가 역사에 큰 획을 긋기 전, 메이는 천체물리학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락의 전설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학업을 그만뒀지만 결국 런던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행성 간 먼지'에 관한 논문을 집필했습니다.

 

퀸의 리드 기타리스트가 길고 긴 과학 논문을 썼다는 생경함은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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